글

위장약을 몇 달 먹었더니 손이 떨리고 걸음이 느려졌다면 — 약물 유발 파킨슨증(Drug-Induced Parkinsonism), 파킨슨병과 다른 점과 회복 가이드

이미지
일흔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온 따님이 진료실에 앉자마자 휴대폰 동영상부터 보여 주었다. 식탁에서 숟가락을 드는 손이 잘게 떨리고, 걸음은 발을 끄는 듯 짧았다. "파킨슨병이지요?" 그런데 약 수첩을 펼쳐 보니 답이 다른 데 있었다. 속이 더부룩하다며 몇 달째 드시던 위장운동 촉진제, 그 한 줄이었다. 파킨슨병처럼 보이지만 파킨슨병이 아닌 병 손 떨림·동작 느려짐·근육 뻣뻣함·종종걸음, 이 네 가지를 묶어 '파킨슨증(parkinsonism)'이라 부른다. 파킨슨병은 그중 하나의 원인일 뿐이고, 파킨슨병 다음으로 흔한 원인이 바로 약물 유발 파킨슨증(Drug-Induced Parkinsonism, DIP) 이다. 뇌 속 운동 조절 회로(선조체)에서 도파민 신호를 받는 D2 수용체를 약이 막아 버리면, 도파민 세포가 멀쩡한데도 파킨슨병과 똑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원인 약물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국내 연구들에서 가장 흔한 원인으로 반복해서 꼽히는 것은 소화불량에 널리 쓰이는 레보설피리드 (위장운동 촉진제)이고, 구역·구토약 메토클로프라미드 , 어지럼·편두통 예방에 쓰이는 플루나리진 , 그리고 할로페리돌·리스페리돈 같은 항정신병약 이 뒤를 잇는다. 고령이고 여성일수록, 용량이 크고 복용 기간이 길수록 위험이 높다. 진료실에서 파킨슨병과 구별하는 단서 몇 가지 특징이 힌트가 된다. 파킨슨병은 대개 한쪽 손에서 시작해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번지지만, 약물 유발 파킨슨증은 약을 시작한 뒤 몇 주에서 몇 달 사이에 양쪽이 비슷하게 나타나는 일이 많다. 떨림도 가만히 있을 때보다 무언가를 들거나 자세를 유지할 때 도드라지는 경우가 있고, 입술이나 혀가 저절로 움직이는 이상운동이 함께 보이기도 한다. 다만 증상만으로 두 병을 완벽히 가르기는 어렵다. 그래서 진단의 첫걸음은 검사가 아니라 약 수첩과 처방 이력을 한 줄씩 짚어 보는 일 이다. 구별이 어려운 경우에는 도파민 운반체 영상(FP-CIT PET)이 도움이 된다. 순수...

머리 부딪힌 기억도 가물한데 두 달 뒤 사람이 달라졌다면 — 만성 경막하혈종(Chronic Subdural Hematoma), CT 한 장으로 잡아내는 병

이미지
외래에서 보호자가 이렇게 말하는 날이 있다. "두어 달 전까지는 멀쩡하셨어요. 그런데 요새 걸음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고, 말수가 부쩍 줄었어요." 정작 환자분은 머리를 다친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런데 보호자에게 되물으면 그제야 나온다. "아, 초여름에 욕실에서 미끄러져 뒤통수를 한 번 찧긴 했는데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으셨거든요." 고령, 몇 주에서 몇 달 전의 가벼운 머리 충격, 그리고 서서히 달라진 사람. 이 세 가지가 겹치면 신경과에서 가장 먼저 뇌 CT를 찍어 보는 상황 중 하나가 된다. 만성 경막하혈종(chronic subdural hematoma)이다. 왜 다친 날이 아니라 두 달 뒤에 나타날까 뇌와 두개골 사이에는 교정맥(bridging vein)이라는 가는 정맥이 다리처럼 걸쳐 있다. 나이가 들면 뇌 부피가 줄면서 그 사이 공간이 넓어지고, 이 정맥은 더 길게 늘어난 상태가 된다. 길게 늘어난 다리는 작은 흔들림에도 잘 끊어진다. 젊은 사람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정도의 충격에 정맥이 미세하게 찢어지고, 피가 아주 천천히 고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이는 속도가 느리니 증상도 느리게 온다. 대개 2주에서 3개월 사이다. 게다가 진료 현장에서 보면 뚜렷한 외상력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절반 가까이 된다. "부딪힌 적 없다"는 말이 이 병을 배제하는 근거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항혈소판제나 항응고제를 드시는 분, 술을 자주 드시는 분, 최근 들어 자꾸 넘어지시는 분에게 특히 흔하다. 치매가 시작된 줄 알고 오신다 이 병의 까다로운 점은 증상이 통증보다 기능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자주 보는 것들은 이렇다. 걸음이 불안정해지고 한쪽으로 기운다 한쪽 팔다리에 힘이 덜 들어간다 낮에 자꾸 처지고 멍하며, 성격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는다 두통이 날이 갈수록 조금씩 심해진다 말이 어눌해지거나 단어가 잘 나오지 않는다 소변을 지린다 보행·인지·요실금이 함께 오면 정상압수두...

건강검진 뇌 MRI에 '백질 허혈성 변화'가 적혀 있다면 — 뇌경색일까 나이 탓일까, 대뇌 소혈관질환 바로 알기

이미지
요즘 진료실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건강검진으로 뇌 MRI를 찍었는데 판독지에 "대뇌 백질의 허혈성 변화" 또는 "백질 고신호강도"라고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아픈 데는 없는데, 이게 뇌경색인가요. 치매가 시작된 건가요. 먼저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이 소견은 뇌경색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이 들면 다들 그렇다"며 덮어 둘 일도 아닙니다. 그 사이 어디쯤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실제로 있습니다. 백질 고신호강도란 무엇인가 뇌의 겉(피질)은 신경세포의 몸통이 모인 회백질이고, 그 안쪽은 신경섬유가 지나는 백질입니다. 백질을 먹여 살리는 혈관은 굵은 동맥에서 곧장 갈라져 나온 가느다란 관통동맥 하나뿐이어서, 막혔을 때 대신 피를 대 줄 우회로가 없습니다. 혈압이 오랫동안 높으면 이 작은 혈관의 벽이 두꺼워지고 혈류가 줄면서 주변 백질에 만성적인 손상이 쌓입니다. 그 부위가 MRI의 T2·FLAIR 영상에서 하얗게 보이는 것이 백질 고신호강도입니다. 국제 표준 용어(STRIVE, 2013)로는 대뇌 소혈관질환 의 영상 표지입니다. 판독지에 흔히 쓰이는 "허혈성 변화", "미세혈관성 변화", "노인성 변화"는 대체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어디까지가 나이 탓인가 백질 고신호강도는 나이가 들수록 흔해집니다. 60대에서는 상당수, 80대 이상에서는 대부분에게서 정도의 차이로 관찰됩니다. 영상 판독에서는 보통 파제카스(Fazekas) 등급 0~3으로 표시합니다. 뇌실 주변이나 피질하에 점처럼 흩어져 있는 정도(1등급)는 나이에 걸맞은 소견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병변이 서로 붙어 덩어리를 이루는 정도(3등급)는, 특히 60대 이하에서 나왔다면 나이 탓으로 넘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핵심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나이에 비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해마다 늘고 있는가 입니다. 몇 년 전 찍은 영상이 있다면 그 비교가 등급 ...

몇 분 만에 멀쩡해졌는데 왜 응급실에 가야 할까 — 일과성 뇌허혈발작(TIA), 사라진 증상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

이미지
진료실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뇌경색으로 실려 온 환자의 보호자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한 십 분쯤 팔에 힘이 빠졌었는데, 금방 괜찮아져서 그냥 넘어갔어요." 그 십 분이 바로 일과성 뇌허혈발작(TIA, Transient Ischemic Attack) 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증상이 스스로 사라진다는 바로 그 성질 때문에, 이 병은 병원에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증상이 사라졌다고 혈관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TIA는 뇌로 가는 혈관이 일시적으로 막혔다가 뚫리면서, 뇌 조직이 죽기 전에 혈류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과거에는 "24시간 안에 회복되면 TIA"라고 시간으로 정의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MRI 확산강조영상을 찍어 보면 증상이 30분 만에 사라진 환자에게서도 실제 뇌경색 병변이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심장협회·미국뇌졸중학회는 2009년부터 '뇌경색 병변 없이 일시적인 신경학적 증상이 나타난 경우' 라는 조직 기반 정의를 쓰고 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증상이 사라진 것은 혈전이 잘게 부서져 떠내려갔다는 뜻이지, 혈전을 만들어 낸 원인 — 목동맥의 죽상경화판, 심방세동으로 심장에서 날아온 색전 — 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인이 그대로 있으니 같은 일이 또 일어납니다. 다음번에는 뚫리지 않을 뿐입니다. 가장 위험한 시간은 발생 직후 48시간 TIA 이후 90일 안에 뇌경색이 발생할 확률은 연구에 따라 약 5~10%로 보고되며, 그중 절반가량이 첫 48시간 안에 일어납니다. 즉 TIA는 "나중에 검사받으세요"가 아니라 심근경색 직전의 불안정 협심증과 같은 성격의 응급 상황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시기에 손을 쓰면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영국의 EXPRESS 연구와 프랑스의 SOS-TIA 연구는 TIA 환자를 며칠 뒤 외래로 돌려보내는 대신 당일에 평가하고 즉시 치료를 시...

걸음이 먼저 이상해졌다면 — 정상압수두증(NPH), 되돌릴 수 있는 치매를 놓치지 않는 법

이미지
일흔여덟 되신 어르신이 따님 팔을 붙잡고 들어오시는데,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잘 떨어지지 않았다. 따님은 “요즘 자꾸 깜빡하셔서 치매인가 싶어 왔어요”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씩 되짚어 보니 순서가 달랐다. 걸음이 먼저 이상해졌고, 화장실이 급해진 것이 그다음, 깜빡거림은 가장 나중이었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알츠하이머병은 기억이 먼저 무너지고 걸음은 한참 뒤에야 흔들린다. 반대로 걸음이 먼저 라면, 정상압수두증(normal pressure hydrocephalus, NPH)을 한 번은 떠올려야 한다. 세 가지 증상, 그리고 나타나는 순서 1965년 하킴과 애덤스가 보고한 이래 NPH의 전형은 보행장애 · 배뇨장애 · 인지저하 셋으로 정리된다. 모두 있어야 진단되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보행장애 하나만 뚜렷한 경우가 오히려 흔하다. 다만 이 순서대로 나타났다면 가능성은 꽤 올라간다. 걸음의 모양도 특징이 있다. 보폭이 짧아지고 발을 끌며, 두 발 사이가 벌어진 채 자석에 붙은 듯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돌아설 때 한 번에 돌지 못하고 여러 걸음으로 나누어 도는 것도 자주 본다. 파킨슨병과 헷갈리기 쉽지만, NPH는 손 떨림이나 팔 흔들림은 비교적 유지된 채 다리 쪽만 굳는 편이다. 진단 — ‘정상압’이라는 이름의 함정 뇌 MRI에서 뇌실이 커져 있는 것이 출발점이다(에번스 지수 0.3 초과). 여기에 머리 위쪽 뇌고랑은 오히려 눌려 좁아지고 실비우스열은 벌어지는 소견(DESH)이 함께 보이면 의심이 짙어진다. 이름 그대로 뇌압은 정상 범위라, 압력이 정상이니 괜찮다는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압력의 절대값이 아니라 뇌척수액의 순환이다. 결정적인 검사는 요추천자 배액검사(탭 테스트) 다. 뇌척수액을 30~50mL 빼낸 뒤 며칠 사이 걸음이 실제로 좋아지는지를 직접 재 본다. 반응이 뚜렷하면 뇌실-복강 단락술(션트)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션트가 만능은 아니어서, 경막하출혈·감염·기기 고장 같은 합병증을 나이·동반질환과 함께 ...

일어설 때마다 눈앞이 핑 돌고 캄캄해진다면 — 기립성 저혈압(Orthostatic Hypotension), 빈혈이 아니라 자율신경계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진료실에 오시는 분 중에 "저는 원래 저혈압 체질이라 일어서면 늘 핑 돕니다"라고 스스로 진단하고 오시는 분들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침대에서 몸을 세울 때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고 하신다. 빈혈약을 몇 달째 드셨는데도 그대로라는 말에, 저는 혈압계부터 꺼낸다. 누운 채로 한 번, 일어선 직후와 3분 뒤에 각각 한 번씩. 그 세 번의 숫자가 진단의 절반을 결정한다. "빙빙 도는" 어지럼과 "핑 도는" 어지럼은 다르다 어지럼을 호소하는 환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가르는 질문은 "세상이 빙빙 도나요, 아니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쓰러질 것 같나요"이다. 전자는 이석증이나 메니에르병처럼 전정기관이 문제인 진짜 회전성 어지럼(vertigo)이고, 후자는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부족해지는 실신 전 증상(presyncope)에 가깝다. 자세를 바꿀 때, 특히 앉았다 일어설 때만 반복된다면 후자, 즉 기립성 저혈압을 먼저 의심한다. 진단 기준은 숫자로 정해져 있다 기립성 저혈압은 누운 자세에서 일어선 뒤 3분 이내에 수축기 혈압이 20mmHg 이상, 또는 이완기 혈압이 10mmHg 이상 떨어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아침에 유독 심하고, 식사 직후나 더운 날씨에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증상은 있는데 이 기준을 못 채우면 기립경 검사(tilt table test)로 더 정밀하게 확인하기도 한다. "저혈압 체질"이 아니라 원인을 찾아야 한다 기립성 저혈압은 하나의 병명이라기보다 여러 원인이 만들어내는 결과에 가깝다. 이뇨제·알파차단제·항우울제 같은 약물, 탈수, 오래 누워 지낸 뒤의 탈조건화가 흔한 원인이다. 그런데 당뇨병으로 인한 자율신경병증이나, 파킨슨병·다계통위축증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초기 신호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변비·후각 저하·렘수면행동장애 같은 증상이 함께 있다면, 혈압약만 조절하고 끝낼 게 아니라 신경과적 평가를 함께 받아...

귀에서 계속 소리가 난다면 — 이명(Tinnitus), 박동성과 비박동성의 감별, 그리고 치료의 실제

이미지
이비인후과에서 청력검사까지 다 받았는데 "이상 없다"는 말만 들었다며 신경과로 넘어오시는 분들이 있다. 몇 달째 귀에서 "삐—" 소리나 "쏴—" 소리가 난다고 하신다. 조용한 밤에 유독 심해져서 잠을 설친다고도 하신다. 검사가 다 정상이었다는 말에 저는 오히려 한 가지를 더 여쭤본다. "그 소리, 맥박이랑 같이 뛰나요?" 이명은 병명이 아니라 증상이다 이명(tinnitus)은 외부에 소리원이 없는데도 소리를 지각하는 상태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하나의 질환이 아니라 여러 원인이 만들어내는 공통 증상이라서, 진단의 첫 갈래는 늘 같다 — 이 소리가 맥박과 무관하게 계속 울리는 "비박동성"인지, 심장 박동에 맞춰 뛰는 "박동성"인지부터 가른다. 대부분은 비박동성이고 소음 노출·노화성 난청·특정 약물이 손상시킨 내이 유모세포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박동성이라면 접근이 완전히 달라진다. 맥박과 같이 뛰는 소리는 혈관이 원인일 수 있다 박동성 이명의 흔한 원인 중 하나가 특발성 두개내압 상승(idiopathic intracranial hypertension, IIH)이다. 젊고 비만한 여성에서 특히 잘 생기는데, 뇌 정맥동(가로정맥동)이 눌려 좁아지면서 그 좁아진 부위로 혈류가 지나갈 때 "쉬익" 하는 바람 소리 같은 이명이 생긴다. 두통이나 시야 흐림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동정맥루, 경정맥구 이상, 두경부 혈관의 동맥경화나 협착도 박동성 이명을 만든다. 원인이 혈관 쪽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정맥동 협착에 스텐트를 넣거나 기저 질환을 교정해 실제로 소리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 비박동성 이명과 달리 '고칠 수 있는' 이명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 다음이면 미루지 말고 병원으로 오세요 — 맥박과 같이 뛰는 소리(박동성)이면서 두통·시야 흐림이 동반될 때 · 한쪽 귀 소리가 갑자기 시작되며 그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