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8월, 2026의 게시물 표시

걸음이 먼저 이상해졌다면 — 정상압수두증(NPH), 되돌릴 수 있는 치매를 놓치지 않는 법

이미지
일흔여덟 되신 어르신이 따님 팔을 붙잡고 들어오시는데,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잘 떨어지지 않았다. 따님은 “요즘 자꾸 깜빡하셔서 치매인가 싶어 왔어요”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씩 되짚어 보니 순서가 달랐다. 걸음이 먼저 이상해졌고, 화장실이 급해진 것이 그다음, 깜빡거림은 가장 나중이었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알츠하이머병은 기억이 먼저 무너지고 걸음은 한참 뒤에야 흔들린다. 반대로 걸음이 먼저 라면, 정상압수두증(normal pressure hydrocephalus, NPH)을 한 번은 떠올려야 한다. 세 가지 증상, 그리고 나타나는 순서 1965년 하킴과 애덤스가 보고한 이래 NPH의 전형은 보행장애 · 배뇨장애 · 인지저하 셋으로 정리된다. 모두 있어야 진단되는 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보행장애 하나만 뚜렷한 경우가 오히려 흔하다. 다만 이 순서대로 나타났다면 가능성은 꽤 올라간다. 걸음의 모양도 특징이 있다. 보폭이 짧아지고 발을 끌며, 두 발 사이가 벌어진 채 자석에 붙은 듯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돌아설 때 한 번에 돌지 못하고 여러 걸음으로 나누어 도는 것도 자주 본다. 파킨슨병과 헷갈리기 쉽지만, NPH는 손 떨림이나 팔 흔들림은 비교적 유지된 채 다리 쪽만 굳는 편이다. 진단 — ‘정상압’이라는 이름의 함정 뇌 MRI에서 뇌실이 커져 있는 것이 출발점이다(에번스 지수 0.3 초과). 여기에 머리 위쪽 뇌고랑은 오히려 눌려 좁아지고 실비우스열은 벌어지는 소견(DESH)이 함께 보이면 의심이 짙어진다. 이름 그대로 뇌압은 정상 범위라, 압력이 정상이니 괜찮다는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압력의 절대값이 아니라 뇌척수액의 순환이다. 결정적인 검사는 요추천자 배액검사(탭 테스트) 다. 뇌척수액을 30~50mL 빼낸 뒤 며칠 사이 걸음이 실제로 좋아지는지를 직접 재 본다. 반응이 뚜렷하면 뇌실-복강 단락술(션트)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션트가 만능은 아니어서, 경막하출혈·감염·기기 고장 같은 합병증을 나이·동반질환과 함께 ...

일어설 때마다 눈앞이 핑 돌고 캄캄해진다면 — 기립성 저혈압(Orthostatic Hypotension), 빈혈이 아니라 자율신경계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미지
진료실에 오시는 분 중에 "저는 원래 저혈압 체질이라 일어서면 늘 핑 돕니다"라고 스스로 진단하고 오시는 분들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침대에서 몸을 세울 때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고 하신다. 빈혈약을 몇 달째 드셨는데도 그대로라는 말에, 저는 혈압계부터 꺼낸다. 누운 채로 한 번, 일어선 직후와 3분 뒤에 각각 한 번씩. 그 세 번의 숫자가 진단의 절반을 결정한다. "빙빙 도는" 어지럼과 "핑 도는" 어지럼은 다르다 어지럼을 호소하는 환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가르는 질문은 "세상이 빙빙 도나요, 아니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쓰러질 것 같나요"이다. 전자는 이석증이나 메니에르병처럼 전정기관이 문제인 진짜 회전성 어지럼(vertigo)이고, 후자는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부족해지는 실신 전 증상(presyncope)에 가깝다. 자세를 바꿀 때, 특히 앉았다 일어설 때만 반복된다면 후자, 즉 기립성 저혈압을 먼저 의심한다. 진단 기준은 숫자로 정해져 있다 기립성 저혈압은 누운 자세에서 일어선 뒤 3분 이내에 수축기 혈압이 20mmHg 이상, 또는 이완기 혈압이 10mmHg 이상 떨어지는 것으로 정의한다. 아침에 유독 심하고, 식사 직후나 더운 날씨에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증상은 있는데 이 기준을 못 채우면 기립경 검사(tilt table test)로 더 정밀하게 확인하기도 한다. "저혈압 체질"이 아니라 원인을 찾아야 한다 기립성 저혈압은 하나의 병명이라기보다 여러 원인이 만들어내는 결과에 가깝다. 이뇨제·알파차단제·항우울제 같은 약물, 탈수, 오래 누워 지낸 뒤의 탈조건화가 흔한 원인이다. 그런데 당뇨병으로 인한 자율신경병증이나, 파킨슨병·다계통위축증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의 초기 신호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변비·후각 저하·렘수면행동장애 같은 증상이 함께 있다면, 혈압약만 조절하고 끝낼 게 아니라 신경과적 평가를 함께 받아...

귀에서 계속 소리가 난다면 — 이명(Tinnitus), 박동성과 비박동성의 감별, 그리고 치료의 실제

이미지
이비인후과에서 청력검사까지 다 받았는데 "이상 없다"는 말만 들었다며 신경과로 넘어오시는 분들이 있다. 몇 달째 귀에서 "삐—" 소리나 "쏴—" 소리가 난다고 하신다. 조용한 밤에 유독 심해져서 잠을 설친다고도 하신다. 검사가 다 정상이었다는 말에 저는 오히려 한 가지를 더 여쭤본다. "그 소리, 맥박이랑 같이 뛰나요?" 이명은 병명이 아니라 증상이다 이명(tinnitus)은 외부에 소리원이 없는데도 소리를 지각하는 상태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하나의 질환이 아니라 여러 원인이 만들어내는 공통 증상이라서, 진단의 첫 갈래는 늘 같다 — 이 소리가 맥박과 무관하게 계속 울리는 "비박동성"인지, 심장 박동에 맞춰 뛰는 "박동성"인지부터 가른다. 대부분은 비박동성이고 소음 노출·노화성 난청·특정 약물이 손상시킨 내이 유모세포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박동성이라면 접근이 완전히 달라진다. 맥박과 같이 뛰는 소리는 혈관이 원인일 수 있다 박동성 이명의 흔한 원인 중 하나가 특발성 두개내압 상승(idiopathic intracranial hypertension, IIH)이다. 젊고 비만한 여성에서 특히 잘 생기는데, 뇌 정맥동(가로정맥동)이 눌려 좁아지면서 그 좁아진 부위로 혈류가 지나갈 때 "쉬익" 하는 바람 소리 같은 이명이 생긴다. 두통이나 시야 흐림이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동정맥루, 경정맥구 이상, 두경부 혈관의 동맥경화나 협착도 박동성 이명을 만든다. 원인이 혈관 쪽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정맥동 협착에 스텐트를 넣거나 기저 질환을 교정해 실제로 소리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 비박동성 이명과 달리 '고칠 수 있는' 이명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 다음이면 미루지 말고 병원으로 오세요 — 맥박과 같이 뛰는 소리(박동성)이면서 두통·시야 흐림이 동반될 때 · 한쪽 귀 소리가 갑자기 시작되며 그쪽 ...

저녁마다 눈이 더 처지고 사물이 두 개로 보인다면 — 중증근무력증(Myasthenia Gravis), 안검하수·복시의 감별과 흉선종 검사

이미지
오후 진료 시간대에 오시는 분 중 유독 눈이 처져 보이는 분들이 있다. 아침엔 멀쩡했는데 오후만 되면 한쪽 혹은 양쪽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고, 물체가 둘로 겹쳐 보인다고 하신다.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몇 달을 넘기다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패턴 자체가 진단의 실마리다. 가장 큰 특징은 '변동성'이다 중증근무력증(myasthenia gravis, MG)은 신경과 근육 사이의 신호 전달 지점(신경근접합부)에서 아세틸콜린 수용체를 몸의 면역계가 스스로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근육을 쓸수록 힘이 빠지고 쉬면 회복되는 것이 핵심 특징이라, 아침엔 괜찮다가 오후·저녁으로 갈수록 눈꺼풀이 처지고(안검하수) 복시가 심해진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팔을 반복해서 들 때 유독 힘이 빠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안구형과 전신형 처음엔 눈 증상만 있는 안구형(ocular MG)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다. 이 중 일부는 발병 2년 안에 씹기·삼키기·팔다리 힘까지 번지는 전신형(generalized MG)으로 진행한다. 말이 어눌해지거나 음식을 삼키기 힘들어지고, 팔을 들어 머리를 감기 힘들다는 호소가 겹치면 전신형을 의심한다. 진단 — 얼음주머니 검사부터 항체 검사까지 진찰실에서 간단히 해 볼 수 있는 것이 얼음주머니 검사(ice pack test)다. 처진 눈꺼풀에 얼음주머니를 2분 정도 대면 신경근 전달이 일시적으로 좋아져 처짐이 뚜렷이 호전되는데, 민감도가 높아 선별에 유용하다. 확진은 혈액에서 아세틸콜린 수용체 항체(AChR-Ab)나 MuSK 항체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반복신경자극검사나 단일섬유근전도 검사를 추가한다. 흉선종이 동반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진단 시 흉부 CT로 흉선을 확인하는 것이 표준 절차다. ⚠️ 숨쉬기가 갑자기 힘들어지거나 삼키다 자꾸 사레들리고 말이 웅얼거려진다면 근무력위기(myasthenic crisis)일 수 있습니다. 호흡근까지 약해지는 응...

웃다가 갑자기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면 — 기면증(narcolepsy)의 진단 기준과 탈력발작, '잠이 많다'는 오해를 넘어

이미지
"잠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로 넘기기엔 다른 병 지난달 진료실에 스무 살 대학생이 왔다. 강의 시간마다 조는 게 습관이 됐고, 밤에 여덟 시간을 넘게 자도 낮에는 여지없이 눈이 감긴다고 했다. 그런데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가 걸렸다. "친구들이랑 웃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은 적이 있어요." 그 한 문장이 기면증(narcolepsy)이라는 진단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기면증은 단순히 잠이 많은 체질이 아니다. 밤잠을 충분히 자도 낮 동안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매일 반복되고, 식사 중이나 대화 도중, 심하면 운전 중에도 순간적으로 잠에 빠져드는 병이다. 웃다가 힘이 풀리는 순간 — 탈력발작(cataplexy) 기면증을 다른 졸림증과 가르는 가장 확실한 단서는 탈력발작이다. 크게 웃거나 놀랐을 때, 화가 났을 때처럼 감정이 강하게 움직이는 순간 갑자기 근육의 힘이 빠진다. 무릎이 꺾이거나 고개가 떨어지거나 얼굴 근육이 축 처지는데, 의식은 또렷하게 깨어 있다. 렘수면 동안에만 일어나야 할 근육 이완이 깨어 있는 상태로 끼어드는 것이다. 탈력발작이 있으면 제1형(Type 1) 기면증, 없으면 제2형(Type 2)으로 구분한다. 제1형은 뇌척수액의 히포크레틴(오렉신) 수치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이 물질을 만드는 시상하부 신경세포가 자가면역 반응으로 파괴되는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진단은 하룻밤 검사로 끝나지 않는다 진단에는 수면다원검사(밤새 뇌파·안구운동·근전도를 기록)와 다음 날 이어지는 수면잠복기반복검사(MSLT)가 필요하다. 낮 동안 20분씩 다섯 차례 낮잠을 재는데, 평균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8분 이하이고 그중 두 번 이상에서 렘수면이 바로 나타나면 기면증에 부합한다. 필요하면 뇌척수액 히포크레틴 농도를 직접 측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여러 연구에서 첫 증상부터 진단까지 평균 10년 넘게 걸린다고 보고한다. 증상이 흔히 10대 중후반에 시작되다 보니 ...

제가 쓴 신경신학 책을 5일간 무료로 드립니다 — 8월 26일(수)부터

이미지
진료실 이야기를 주로 올리는 블로그에 책 소식을 올려 조금 쑥스럽습니다. 그래도 이 블로그를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알려드리는 게 맞겠다 싶어 짧게 적습니다. 제가 쓴 영문 신경신학 에세이 The God Neuroscience Found — A Neurotheology of the Embrace from Behind 의 킨들판을 5일간 무료 로 풉니다. 기간 (한국시간) 8월 26일(수) 오후 4시 ~ 8월 31일(월) 오후 4시 이후에는 정가 $9.99로 돌아갑니다. 어떤 책인가 25년간 스캔을 읽고, 환자를 진찰하고, 마지막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앉아 지냈습니다. 뇌는 제가 아는 가장 정직한 장기입니다. 임상의에게도 아부하지 않고, 신앙인에게도 아부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영상과 죽음을 함께 지켜본 뒤, 그 둘이 두 분야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아차린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쓸 수 있었던 기록입니다. 향심기도 중인 프란치스코회 수녀들의 SPECT 영상 — 두정엽이 어두워지고 전두엽이 밝아지며 자아의 경계가 부드러워지는 순간 장기 명상가에게서 실제로 측정되는 더 두꺼운 전전두엽 피질 방언을 할 때 조용해지는 의도 조절 회로 신앙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평균 4년 더 긴 수명 그리고 뇌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것들 — 의식의 어려운 문제, 임종 직전의 명료함, 미세조정된 우주 읽는 법 아마존 킨들 책이라 킨들 앱(무료) 만 있으면 휴대폰으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아마존 계정으로 로그인해 위 표지를 누르고 "Buy now with 1-Click" 을 누르면 $0.00으로 결제됩니다. 아마존에서 무료로 받기 → "지금 이 페이지를 읽고 있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당신의 등 뒤에서 두 팔로 조용히 당신을 안고 있습니다." — 맺음말에서 한국어판 『뇌과학이 찾은 신 — 백허그의 신경신학』은 국내 서점에서 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읽어보시고 마음에 닿는 부분이 있으셨다면, 아마존에 짧게 별점이나 한 줄을 남겨주시면 큰 힘...

방금 대답해 준 걸 또 묻는다면 — 일과성 완전기억상실(TGA), 치매의 시작도 뇌졸중도 아닌 하루짜리 기억 공백

이미지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진료실 문을 열었다. 전날 오후, 텃밭에서 일하다 들어온 아내가 "내가 왜 여기 있지?"를 스무 번쯤 물었다고 했다. 밥은 혼자 차려 먹었고, 남편 이름도 자기 이름도 정확히 말했고, 손발도 멀쩡했다. 그런데 방금 대답해 준 말을 십 초 뒤에 똑같이 다시 물었다. 저녁 무렵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아내는 그 반나절을 통째로 기억하지 못했다. 일과성 완전기억상실(transient global amnesia, TGA)은 이렇게 온다. 신경과 외래에서 보호자가 가장 겁에 질린 얼굴로 데려오는 증상 중 하나다. 기억만 지워지고, 나머지는 그대로다 1990년 호지스와 월로우가 정리한 진단 기준이 지금도 쓰인다. 요점은 이렇다. 발작이 목격자에 의해 확인 되어야 하고, 새로운 기억이 저장되지 않는 전향성 기억상실 이 뚜렷해야 하며, 의식은 맑고 자기가 누구인지는 안다 . 마비나 감각 이상 같은 국소 신경 증상이 없고, 최근 머리를 다치거나 뇌전증을 앓고 있지 않아야 하며, 24시간 안에 회복 된다.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이 특징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답을 들어도 그 답이 저장되지 않으니 몇 초 뒤 처음 묻는 질문이 되는 것이다. 대개 4~8시간쯤 지속되고, 회복된 뒤에는 그 시간대의 기억만 영영 비어 있다. 찬물 샤워나 수영, 격한 운동, 성관계, 심한 감정적 동요 뒤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한 두 가지 오해 첫째, "치매가 시작된 것"이라는 오해. 치매의 기억장애는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서서히 나빠지고 되돌아오지 않는다. TGA는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원상복구된다. 성질이 다른 현상이다. 둘째, "미니 뇌졸중"이라는 오해. 순수하게 기억만 잃는 일과성 허혈발작은 매우 드물다. TGA에서 혈관이 막힌 증거가 나오는 경우도 거의 없다. 다만 반대로 "그러니 아무 문제 없다"고 넘겨서도 곤란하다. 메타분석에서 재발률은 약 13%였고, ...

물집은 다 아물었는데 그 자리가 계속 아프다면 — 대상포진후 신경통(PHN), 항바이러스제로 예방된다는 오해와 실제 치료법

이미지
대상포진을 앓고 석 달쯤 지나 진료실에 오시는 분들이 있다. 발진은 흔적만 남았고 물집도 다 아물었는데 그 자리가 여전히 아프다고 하신다. 옷깃이 스치기만 해도 화끈거리고 바람만 닿아도 따갑다고. 피부과에서는 다 나았다고 했는데 왜 아프냐고 물으신다. 피부는 나았다. 아픈 곳이 피부가 아닐 뿐이다. 물집이 아문 뒤에도 아픈 이유 어린 시절 수두를 앓고 나면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는 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척수 옆 신경절에 숨어 조용히 지낸다. 나이가 들면서 이 바이러스를 눌러 두던 세포면역이 약해지면 바이러스가 다시 깨어나 신경을 타고 피부까지 내려온다. 발진이 몸 한쪽에 띠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신경이 지배하는 피부 영역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신경 자체가 상한다는 점이다. 피부 병변이 아물어도 손상된 감각신경은 잘못된 신호를 계속 보낸다. 자극이 없는데도 통증이 생기고, 솜털이 스치는 정도의 약한 자극이 극심한 통증으로 느껴진다. 뒤엣것을 이질통(allodynia)이라 부르는데, 환자분들이 "옷을 못 입겠다"고 표현하시는 바로 그 증상이다. 언제부터 대상포진후 신경통인가 발진이 생긴 시점부터 90일, 그러니까 석 달이 지나도 통증이 남아 있으면 대상포진후 신경통으로 본다. 대상포진을 앓은 사람이 다 겪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위험 인자는 나이다. 50세 미만에서는 드물고 60세를 넘으면 확률이 뚜렷하게 올라간다. 급성기 통증이 유난히 심했던 경우, 발진이 넓고 심했던 경우, 발진이 돋기 전부터 그 부위가 아팠던 경우에도 더 잘 남는다. ⚠️ 이마나 눈 주위에 발진이 생겼거나 특히 콧등 끝에 물집이 잡혔다면 각막까지 침범할 수 있어 안과 진료가 급합니다. 귀 주변의 통증·물집과 함께 한쪽 얼굴이 마비되거나 어지럼·청력저하가 동반되면 람세이 헌트 증후군일 수 있으니 지체 없이 병원으로 오십시오. 흔한 오해: "항바이러스제를 빨리 먹으면 신경통은 안 생긴다" 발진이 시작된 뒤 72...

2026년, 두통 진료실에서 실제로 달라진 것들

이미지
진료실에서 편두통 환자분을 볼 때마다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 요즘 새로 나온 치료법 있어요?" 두통 분야는 최근 5~6년 사이 유례없이 빠르게 바뀌고 있어서, 이 질문에 매번 조금씩 다른 답을 드리게 된다. 다만 매달 쏟아지는 논문 중 실제로 진료를 바꾸는 것은 소수다. 2026년 현재 시점에서, 그중 정말 알아둘 만한 변화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CGRP 항체, 5년을 넘긴 안전성 데이터 에레뉴맙·프레마네주맙·갈카네주맙 같은 CGRP 단클론항체가 국내에 도입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처음 이 약을 권할 때 많은 환자분들이 "새 약이라 장기적으로 어떨지 모르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최근 발표된 5년 추적 관찰 데이터에서는 장기 사용에 따른 새로운 안전성 문제가 확인되지 않았고, 효과도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는 것으로 나왔다. 처방하는 입장에서도 안도할 수 있는 결과다. 경구 게판트, 국내 도입이 가까워졌다 리메게판트·아토게판트 같은 경구 CGRP 수용체 길항제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널리 쓰이는데, 국내에는 아직 정식 도입되지 않았다. 트립탄 계열 약을 심혈관 질환 때문에 못 쓰는 환자들에게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 보험 적용 논의가 진행 중이라, 2026~2027년 사이 처방 가능해질 가능성이 있다. 마그네슘, 다시 한 번 근거가 쌓였다 2024~2025년 발표된 메타분석 두 건에서 경구 마그네슘이 편두통 빈도를 의미 있게 줄인다는 결과가 재확인됐다. 권장 용량은 여전히 하루 400~600mg, 글리시네이트나 시트르산 형태가 흡수율 면에서 나은 편이다. 흔히 부작용 없는 보조제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근거 수준은 생각보다 탄탄하다. 1차 예방약의 자리가 바뀌고 있다 미국두통학회(AHS)가 발표한 최신 가이드라인에서는 CGRP 항체를 1차 예방 옵션으로 올려놓았다. 예전에는 베타차단제나 항우울제를 먼저 써보고 실패한 뒤에야 CGRP 항체를 고려하는 순서였다면, 이제는 환...

요즘 들어 어떤 날은 멀쩡하고 어떤 날은 딴 사람 같다면 — 루이소체 치매(DLB), 알츠하이머병과 다른 진단 기준과 항정신병약물 주의사항

이미지
보호자가 먼저 꺼내는 말은 대개 기억력이 아니다. "어떤 날은 멀쩡한데 어떤 날은 딴 사람 같아요." 혹은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둘러서 옆에서 못 자겠어요." 진료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습관처럼 한 가지를 더 묻습니다. "혹시 방에 누가 있다고, 없는 사람이 보인다고 하시나요?" 대부분 놀란 얼굴로 그렇다고 답합니다. 이 세 가지 — 널뛰는 인지 상태, 잠꼬대를 넘어선 꿈 행동화, 실제로 없는 사람이나 동물이 보이는 환시 — 가 한 사람에게 겹치면 알츠하이머병이 아니라 루이소체 치매(Dementia with Lewy Bodies, DLB)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기억보다 '주의력'과 '보이는 것'이 먼저 흔들린다 알츠하이머병은 최근 일을 자꾸 잊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루이소체 치매는 순서가 다릅니다. 초기부터 주의력과 공간 지각이 흔들려 방금 한 대화도 놓치고 길도 헷갈리는데, 정작 며칠 전 있었던 일은 또렷이 기억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손이 굳고 걸음이 느려지는 파킨슨 증상이 겹치면 진단은 더 분명해집니다. 개정된 국제 진단 기준(McKeith 2017)은 핵심 증상으로 ①인지 기능의 뚜렷한 기복 ②반복되는 생생한 환시 ③렘수면행동장애 ④자발적 파킨슨 증상 네 가지를 꼽고, 이 중 둘 이상이 있으면 '가능성 높은 루이소체 치매'로 봅니다. 뇌 도파민 운반체 영상(DAT 스캔)이나 심장 MIBG 검사 같은 보조 검사가 하나만 맞아도 진단에 무게가 실립니다. ⚠️ 루이소체 치매 환자는 일반 항정신병약물(특히 할로페리돌 계열)에 극도로 민감합니다. 환시가 심하다고 함부로 처방하면 근육이 급격히 굳고 의식이 처지는 심각한 반응이 올 수 있어, 반드시 신경과·정신건강의학과와 상의해 저용량 퀘티아핀 등으로 신중히 접근해야 합니다. 가족이 먼저 할 수 있는 일 진단명보다 중요한 건 낙상과 기립성 저혈압 관리입니다. 루이소체 ...

코를 심하게 골다가 숨이 멎는다면 — 폐쇄성 수면무호흡증(OSA) 진단 기준과 CPAP 치료, 방치하면 안 되는 이유

이미지
부인 손에 이끌려 진료실에 온 남자분이 있었습니다. 정작 본인은 "코를 좀 곤다뿐이지 멀쩡하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는 옆에서 나왔습니다. 밤새 코를 골다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십 초 넘게 숨소리가 끊겼다가 컥 하며 다시 숨을 쉰다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회의 중에도 꾸벅꾸벅 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조합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코골이와는 다른 병입니다 폐쇄성 수면무호흡증(obstructive sleep apnea, OSA)은 잠든 동안 목 뒤쪽 기도가 반복적으로 좁아지거나 막히면서 숨이 얕아지거나 완전히 멎는 상태입니다. 코골이는 흔하고 대개 무해하지만, 코골이 사이사이에 무호흡·저호흡이 반복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진단은 수면다원검사(polysomnography)로 확인하며, 시간당 무호흡·저호흡 횟수(AHI)를 기준으로 경증(5~15회)·중등도(15~30회)·중증(30회 이상)으로 나눕니다. 진료실에서는 목이 굵고 짧은 체형, 큰 편도, 비만, 후퇴된 턱 같은 특징을 함께 살핍니다. 낮졸림만 보면 놓칩니다 많은 분이 "낮에 안 졸리니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무호흡의 심각도와 낮졸림의 정도는 꼭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혈압이 잘 조절되지 않거나, 아침에 두통이 있거나, 야간뇨가 잦거나, 이유 없이 부정맥이 반복될 때 뒤늦게 무호흡증이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본인이 자각하는 졸림보다 검사 결과가 훨씬 심하게 나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 다음에 해당하면 방치하지 말고 수면다원검사를 받아 보세요 — 배우자가 숨 멎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 운전 중 졸아 위험했던 적이 있다 · 고혈압·부정맥이 약으로도 잘 안 잡힌다 · 아침마다 머리가 무겁고 두통이 있다 · 체중이 늘면서 코골이가 심해졌다. 치료의 중심은 여전히 CPAP입니다 중등도 이상의 무호흡증에서 가장 근거가 확실한 치료는 양압기(CPAP)입니다. 잠자는 동안 공기를 일정 압력으로 불어넣어 기도가 저절로 열려 있게...

가벼운 뇌진탕인데 두통이 몇 주째 안 낫는다면 — 외상후두통(Post-Traumatic Headache), ICHD-3 진단과 회복 가이드

이미지
진료실에 젊은 환자가 들어옵니다. 두 달 전 계단에서 넘어지며 뒤통수를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날 응급실 CT는 깨끗했고, 의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뇌진탕도 아니라던데, 왜 아직도 머리가 아플까요." 이런 질문을 저는 한 달에 몇 번씩 듣습니다. 외상후두통이란 ICHD-3(국제두통질환분류 3판)는 머리 부위 외상을 겪은 뒤 7일 이내에 시작된 두통을 '외상후두통(Headache Attributed to Traumatic Injury to the Head)'으로 분류합니다. 뇌진탕처럼 의식소실이 없는 경미한 손상에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고, 오히려 손상 자체는 가벼웠는데 두통만 오래 남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발생 후 3개월을 기준으로 급성(5.1)과 지속성(5.2)으로 나뉘는데, 지속성으로 넘어가는 비율이 성인의 상당수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갈까 통증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원래 편두통 소인이 있던 사람은 편두통과 거의 같은 형태(박동성·구역·빛 예민)로 나타나고, 목 근육 긴장이 겹치면 긴장형두통 양상이 섞입니다. 여성, 기존 두통 병력, 손상 당시 심한 통증, 그리고 손상 후 불안·수면장애가 함께 있는 경우 지속 기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여러 코호트 연구에서 확인됩니다. 뇌 영상이 정상이라는 사실이 통증이 '가짜'라는 뜻은 아닙니다. 구조적 손상 없이도 통증 신호 처리 경로 자체가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 손상 후 두통이 점점 심해지거나, 반복 구토·의식 변화·한쪽 팔다리 힘빠짐·발음 이상이 동반되면 지체하지 말고 응급실로 가야 합니다. 뒤늦게 나타나는 경막하출혈 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치료와 회복 원칙 가장 흔한 실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통증이 두려워 활동을 지나치게 줄이는 것, 다른 하나는 진통제를 매일 복용하다 약물과용두통까지 겹치는 것입니다. 최근 지침은 완전한 안정보다 증상이 악화되지 않는 선에서 가벼운 활동과 일상 복귀를 점진적...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면 — 마그네슘 부족이라는 오해, 안검연축·반측안면경련과의 구별 가이드

이미지
진료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선생님, 눈 밑이 며칠째 파르르 떨려요. 마그네슘이 부족한 걸까요?" 대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다만 아주 가끔, 떨림이 생긴 위치와 번져 가는 방향이 전혀 다른 병을 알려 주기도 한다. 구분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흔한 쪽 — 눈꺼풀 잔떨림(안검 미오키미아) 한쪽, 주로 아래 눈꺼풀이 잔물결처럼 미세하게 움직이는 상태다. 옆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고 본인만 느끼는 경우가 많으며, 눈을 감기게 할 만한 힘은 없다. 눈둘레근의 일부 근섬유가 예민해져서 생기는 양성 현상으로, 수면 부족·과로·스트레스·카페인·알코올·안구건조와 함께 나타난다. 며칠에서 몇 주 사이에 저절로 가라앉고, 특별한 검사나 약이 필요하지 않다. 마그네슘 이야기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이지만 근거는 생각보다 약하다. 눈꺼풀이 떨린다고 찾아온 분에게서 실제로 혈중 마그네슘이 낮게 나오는 일은 드물고, 보충제를 먹으면 잔떨림이 없어진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 준 임상시험도 없다. 마그네슘을 굳이 말릴 이유는 없지만, 먼저 손봐야 할 것은 잠과 커피다. (편두통 예방에서 마그네슘이 갖는 근거는 이와 별개의 문제이며, 그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따로 다뤘다.) 구분해야 할 두 가지 안검연축 — 양쪽 눈이 억지로 감긴다 국소 근긴장이상(dystonia)의 하나다. 양쪽에서 나타나고, 잔떨림이 아니라 눈이 꽉 감기는 수축이다. 밝은 빛, 바람, 독서, 긴장 상황에서 심해지고, 심하면 눈을 뜨고 있기 어려워 운전이나 보행이 위험해진다. 대개 50대 이후 시작되며 여성에게 더 흔하다. 초기에는 눈이 뻑뻑하고 눈부시다는 안구건조 증상으로 오인되기 쉽다. 1차 치료는 보툴리눔 독소 주사이고, 효과가 몇 달 유지되므로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반측안면경련 — 한쪽 얼굴이 아래로 번진다 놓치면 안 되는 쪽이다. 한쪽 눈 주위에서 시작해 몇 달에서 몇 년에 걸쳐 같은 쪽 뺨과 입꼬리, 목까지 내려간다. 눈꺼풀 잔떨림과 달리 잠든 동안에도 이어지...

수면제를 늘리기 전에 — 만성 불면증의 1차 치료는 약이 아니라 CBT-I입니다 (AASM 2026 새 지침 포함)

이미지
진료실에서 자주 듣는 부탁이 있습니다. "선생님, 잠 오는 약 좀 세게 써 주세요." 몇 년째 반 알로 버티다가 이제 한 알로도 잘 안 든다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만성 불면증에서 국제 지침이 첫 번째로 권하는 치료는 약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 못 잔 것과 '불면증'은 다릅니다 국제수면장애분류(ICSD-3)는 만성 불면증을 이렇게 봅니다. 잠들기 어렵거나, 자다 깨서 다시 못 자거나, 원하는 시각보다 너무 일찍 깨는 일이 주 3회 이상, 3개월 넘게 이어지고, 그 결과 낮에 피로·집중력 저하·짜증·졸림 같은 지장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건 뒤쪽입니다. 밤에 몇 시간 잤느냐보다 낮이 망가졌느냐 를 봅니다. 여섯 시간을 자고도 낮이 멀쩡하면 치료 대상이 아니고, 일곱 시간을 자고도 낮이 무너지면 들여다볼 이유가 됩니다. 누구나 여덟 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말은 진단 기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애쓸수록 달아나는 병 불면증인 사람의 뇌는 밤에 오히려 각성돼 있습니다. 이를 과각성(hyperarousal)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는 악순환입니다. 못 잘까 봐 일찍 눕고, 누워서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는 동안 침대는 '자는 곳'이 아니라 '애쓰다 실패하는 곳'으로 학습됩니다. 그래서 정작 소파에서는 졸다가 침실에 들어가면 눈이 말똥해지는 일이 생깁니다. 잠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라, 노력을 거둬야 오는 것에 가깝습니다. 1차 치료는 CBT-I, 그리고 2026년 새 지침 미국내과학회(ACP)는 2016년, 성인 만성 불면증의 첫 치료로 불면증 인지행동치료(CBT-I) 를 강하게 권고했습니다. 미국수면의학회(AASM)도 2021년 지침에서 다요소 CBT-I를 강하게 권고하면서, 같은 지침에서 수면위생 교육만 단독으로 하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고 못 박았습니다. 커피 줄이고 휴대폰 멀리하라는 조언만으로는 만성 불면증이 낫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흔한 오해라 한 번 더 적...